서랍 속 자격증이 썩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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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셀학요정
댓글 0건 조회 1,139회 작성일 21-08-13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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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회사에 다니면서 21년 동안 달려왔다면 나는 엄마로서 21년 동안 달려왔다. 나름대로 아내, 엄마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감사하게도 결혼 후 큰 굴곡이 없었고 온 가족 건강하게 잘 지내왔다. 그러나 큰 아이가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아져 있는 나, 주름이 보이는 나, 볼품없어 보이는 초라한 내가 아내로 엄마로 살았던 내가 아닌 오로지 나다운 나, 자신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들기 시작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찾고 싶은 걸까?

새로 무엇을 시작하기 두려웠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나의 자아실현을 위하여. 우선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자아실현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내 인생에서 큰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때마침 아이 돌봄 일자리가 생겨 대지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봄에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3학년 남자아이의 등하교, 간식 등 하원 등을 봐주는 일이었다. 집안일과 취미활동에 지장이 없어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아이를 등교시켜놓고 집에 오는 길가에 소담스럽게 핀 들꽃을 보았다. 그곳에 멈춰 서서 꽃잎, 줄기, 잎의 모습을 관찰하며 꽃 감상에 빠져버렸다. 파란 작은 꽃이 야리야리하게 줄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붉은색 담벼락과 잘 어우러져 피어있는 들꽃을 보며 웃음을 얻고 희망을 얻었다.


비가 내린 후에는 온 세상의 빛깔이 선명해진다. 나무와 들꽃, 거리의 모습이 청소부가 지나간 듯 꺠끗하고 선명하다. 내 마음도 깨끗하게 정화가 되는 듯했다. 파랗게 핀 들꽃이 내 마음에 들어와 앉았다. 행복한 마음이 솟구쳤다. 내 힘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어 즐거워지니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일 년 남짓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적금을 부었고 가족을 위해 한턱 거하게 썼으며 보고 싶은 책을 사서 봤다. 특히 가장 의미 있었던 것은 글쓰기 특강을 다녔고 그것을 계기로 나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썼다. 나의 힘으로 번 돈을 가장 의미 있게 사용한 것이다. 흐뭇했다.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나를 정돈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다.


이제는 직업을 가져야 했다. 멈춰있었던 나, 나의 인생을 이제라도 찾아가고 싶었다. 잠재되어 있을 나의 또 다른 그 무엇을 찾아가고 싶었다. 어떤 일이든지 경제적 기반이 있어야 도모할 수 있지 않은가. 그 첫 번째 일이 직업을 갖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첫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 놓을까 하다가 사회복지사,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해 놓았었다. 그 자격증은 서랍 속에서 10년은 묵혀 있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크고 난 후 이제야 뒤늦게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하려 한다. 사회복지사로 취직하려니 컴퓨터 다루는 능력이 있어야 했고 간호조무사 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이 있기를 원했고 운전면허는 필수인 경우가 많았다.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로 했다. 코로나로 한참 미뤄졌었는데 드디어 요양보호사 교육을 개강한 것이다. 사회복지사들만 받은 교육반이라서 현직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이 여럿 있었고 의외로 젊은 분들도 많았다. 첫 수업 시간이었다. 센터에 들어서면서 열 체크와 함께 기록을 남긴 후 교실에 들어갔다. 각각의 책상마다 하얀색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선생님과 교육생들은 마스크 쓰고 첫 수업을 시작했다.


기품이 넘치는 선생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본인 소개와 함께 앞으로 받을 교육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그런 후에 교육생들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교육생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멋진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었고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어떤 분은 재가센터를 열어 뜻을 펼치고 싶어 했고 또 다른 어떤 분은 노인복지센터에서 행정 일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대부분 노인을 위한 봉사도 많이 해보신 분들이었다. 나는 취직을 하기 위험이지만 훗날 양가 부모님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해서 교육을 듣게 되었는데 노인을 위한 봉사를 충분히 해보지 못한 것이 조금 부그러웠다. 이렇게 멋진 가치관을 갖고 계시는 분들과 함께 교육을 듣게 되어 기뻤다. 자기소개 시간은 노인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고 감동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한동안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마다 7시간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1교시 2교시가 지나 3교시가 되니 졸음이 몰려왔다. 의자에 앉아 장시간의 교육을 받아본 지가 언제던가. 엉덩이와 다리가 쑤시고 온몸이 찌뿌듯해지기 시작했다. 4교시가 지나 찾아온 점심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시 5교시는 점심을 먹은 후라 그런지 몰려오는 졸음을 참기 어려웠다. 눈치가 빠른 선생님은 "여러분 혹시 남편분들과 대화는 잘 되세요?"

교육생 중 남자분이 딱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을 보시면서

"혹시 선생님은 어떠세요?"

미소로 대답하신다.

"남편분들은 딱 두가지만 잘하시면 돼요. 뭘까요?"

졸음을 참던 교육생들은 대답이 없었지만, 관심을 보였다.

"정말? 진짜?"

저절로 웃음이 났다. 무뚝뚝한 남편들은 공감 능력이 떨어져 아내와 원활한 소통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남편들이 경청하면서 '정말? 진짜? 이렇게 공감만 해줘도 아내와 소통이 좋아질 거라고 하셨다. 듣고 보니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지혜로운 메시지였다. 센스 있는 선생님 덕분에 졸음이 물러가고 7교시 수업까지 잘 마칠 수 있었다.


나를 위해 찾아 떠난 첫 여행, 교육을 성실하게 이수해서 자격증 취득을 꼭 이뤄내 보겠다.. 그리하여 서랍 속 자격증이 썩기 전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쓰임 받는 사회복지사가 되어보리라.



written by 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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